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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두 크리슈나무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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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1895년 인도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영적 스승으로, 14세에 신지학회에 발탁되어 '세계의 교사'로 준비되었으나, 1929년 동방의 별 교단을 해체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핵심으로, 권위와 전통, 조직화된 믿음을 거부하고 개인의 자각과 경험을 통해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교육 철학을 통해 글로벌 관점과 인간, 환경에 대한 관심을 강조했으며, 저술 활동과 강연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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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두 크리슈나무르티
기본 정보
1920년대의 크리슈나무르티
1920년대의 크리슈나무르티
출생일1895년 5월 12일
출생지영국령 인도 제국마드라스 관구마다나팔레
사망일1986년 2월 17일
사망지미국캘리포니아주오하이
직업철학자
작가
강연가
영향애니 베선트
찰스 웹스터 리드비터
올더스 헉슬리
영향을 준 인물
네루
밀러
헉슬리
다르마디카리
파트와르단
폴록
와츠
패커

톨레
소속 기관크리슈나무르티 재단 (설립자)
주요 저서최초이자 최후의 자유 (1954)
삶에 대한 해설 (1956–1960)
알려진 것으로부터의 자유 (1969)
지역동양 철학
인도 철학
시대20세기 철학
친척애니 베선트 (양부모)
이름
로마자 표기Kṛṣṇamūrti
IPA/ˈdʒɪduː ˌkrɪʃnəˈmuːrti/
한글 발음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참고실제 발음은 "지두"에 더 가깝다.

2. 생애

크리슈나무르티는 1895년 인도 브라만 가정에서 태어났다. 14세에 신지학회 (애니 베산트)에 의해 발탁되어 '세계의 교사'로 준비되는 교육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그 전까지는 힌두교적 풍습에 따라 생활했으며, 대부분의 브라만 소년들처럼 힌두교 의례나 경전을 공부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138]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10명의 형제들 가운데 질병과 기근으로 5명만이 살아남았다. 성장 과정에서 찰스 웹스터 리드비터에게서 '세계의 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로부터 미래의 인류를 이끌어 갈 교사로서의 관심이 크리슈나무르티에게 집중되었다.[138]

2. 1. 어린 시절과 신지학회와의 만남 (1895년 ~ 1911년)

크리슈나무르티는 1895년 인도 남부 마드라스(현재의 첸나이) 근교 마다나팔레의 브라만 가정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는 지두 나라니아, 어머니는 산지반마였다. 8번째 아이였기 때문에 인도의 관습에 따라 크리슈나에서 이름을 따 "크리슈나무르티"로 지어졌다.[120] 출생 당시 별자리 점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었지만, 위대한 교사가 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아버지는 대영제국 통치하의 세무 관련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독실하고 상냥한 사람이었으며, 영매 기질이 있어 사망한 크리슈나무르티의 누나를 보기도 했다고 한다.[121] 크리슈나무르티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자신도 누나를 보았다고 한다.[121] 11명의 형제가 있었지만, 그중 6명만이 살아남았다. 브라만 가정의 예배당에는 인도의 신들과 함께 신지학협회의 애니 베산트 사진이 걸려 있었고, 어머니는 베산트나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인도의 성전을 읽어주었다.[121]

마다나팔레에 위치한 크리슈나무르티가 태어난 집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여러 번 이사를 다녔다. 동생 니티야난다는 총명했지만, 크리슈나무르티는 그렇지 못했고, 병 때문에 1년 늦게 학교에 들어가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교사들은 그를 지적으로 뒤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계에는 강한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 아버지 나라니아는 1881년 신지학협회에 가입했고, 퇴직 후 신지학협회에서 다시 일하게 되어 아디야르 본부 근처에서 살았다. 어머니 산지반마는 크리슈나무르티가 10세였던 1905년에 사망했지만,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121]

1910년의 크리슈나무르티


아버지는 신지학 협회에서 사무직으로 일했으며, 집은 가난했다. 14세 무렵, 신지학 협회 간부 찰스 웹스터 리드비터가 크리슈나무르티를 발견했다. 리드비터는 흙투성이 소년이었던 크리슈나무르티의 신성한 오라를 영적으로 알아봤다고 전해지며, 그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영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아버지의 동의를 얻어 크리슈나무르티와 동생 니티야난다를 협회에 데려왔다.

유럽의 신지학 협회로 옮겨진 크리슈나무르티는 마이트레야(미륵보살)라고 불리는 세계 교사(구세주)의 '그릇'이 되도록 리드비터에게서 영재 교육을 받았다. 이 교육은 인도적인 것을 배제하고 영국 신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영어만 사용했고, 모국어였던 텔루구어베다의 말도 잊어갔다. 리드비터는 크리슈나무르티에게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영을 알키오네라고 이름 붙이고, 그의 전생을 영적으로 보았다며 이야기를 만들어 협회 회보에 연재하여 널리 읽혔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영능력으로 신지학의 영적 지도자 마하트마 쿠트후미와 교신할 수 있었다고 하며, 아스트랄체가 몸을 떠나 매일 밤 리드비터와 히말라야 산중의 쿠트후미에게서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122][123] 이 교신은 리드비터의 지도하에 1910년 『대사의 발 아래에서』로 정리되어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1909년 크리슈나무르티는 신지학 협회 회장이었던 애니 베산트를 만났고, 그녀는 크리슈나무르티와 니티야난다의 후견인이 되었다. 베산트가 오랫동안 자신의 아이들과 떨어져 있었고, 크리슈나무르티가 어머니를 잃었던 점 때문에, 두 사람은 모자 관계와 같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나중에 교리나 정치 문제로 의견이 갈라져도 베산트가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의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121] 리드비터에게 발견된 지 5개월 후인 1910년에 신지학 협회의 심령적인 체험인 '제1비전'을 받았다고 한다.[121]

리드비터는 인도 소년을 발견하여 교육했지만, 여러 악평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버지 나라니아는 아들들이 그의 곁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베산트에게 양육권을 넘긴 것을 후회했다. 나라니아는 베산트에게 호소했지만 그녀는 무시했고, 형제를 소수의 선택된 소년들과만 지내도록 하고, 리드비터 등에게 교육시켰다. 신지학 관계자들은 크리슈나무르티에게 과도한 경의를 표했으며, 조직적으로 특별 대우를 했다.[121]

2. 2. 세계 교사로서의 준비와 회의 (1911년 ~ 1929년)

크리슈나무르티는 1895년 인도 브라만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신지학회의 애니 베산트에게 발탁되어 '세계의 교사'로 준비되는 교육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10명의 형제들 중 질병과 기근으로 5명만이 살아남았다. 찰스 웹스터 리드비터는 아디아르 강변에서 크리슈나무르티를 발견하고, 그의 오라가 이기심의 흔적조차 없다고 놀라워했다.[17] 리드비터는 크리슈나무르티가 미륵의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18]

크리슈나무르티, 토마스 포베다노 그림


리드비터에게 발견된 후, 크리슈나무르티는 신지학회에 의해 양육되었다. 크리슈나무르티와 그의 동생 니티아난다(니티아)는 마드라스의 신지학 복합 단지에서 개인 교습을 받았고, 이후 유럽 상류층과 함께 호화로운 삶을 경험하며 해외에서 교육을 받았다.[21][22] 1911년 신지학회는 '동방의 별의 기사단(OSE)'을 설립하고 크리슈나무르티를 그 수장으로 임명했다.

메리 루티엔스에 따르면, 크리슈나무르티는 영적, 세속적 지도와 교육을 받은 후 세계의 스승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27] 리드비터는 크리슈나무르티에게 신비주의적 지도를 병행했다.[29] 크리슈나무르티는 스포츠에 재능을 보였지만, 정규 학교 교육에는 어려움을 겪었고, 대학교육을 포기했다. 그는 여러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30]

1911년 영국에서 크리슈나무르티, 그의 형제 니티야, 애니 베산트, 조지 아룬데일


1911년 4월, 크리슈나무르티는 영국에서 OSE 회원들에게 첫 공개 연설을 했다.[34] 그의 첫 번째 글은 신지학 협회와 관련된 잡지에 책자로 출판되었다.[35]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형제들은 여러 유럽 국가를 방문했다.[36] 크리슈나무르티는 미국의 부유한 후원자 메리 멜리사 호들리 도지 덕분에 재정적 독립을 얻었다.[37]

전쟁 후, 크리슈나무르티는 OSE의 수장으로서 강연, 회의, 토론을 전 세계적으로 시작했다.[38] 1921년 크리슈나무르티는 헬렌 니어링과 사랑에 빠졌지만, 1920년대 중반까지 서로 멀어졌다.[41]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버지는 신지학 협회에서 일했으며,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찰스 W. 리드비터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신성한 오라를 알아보고, 그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영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유럽의 신지학 협회로 간 크리슈나무르티는 마이트레야(미륵보살)라고 불리는 세계 교사의 '그릇'이 되도록 교육받았다. 리드비터는 크리슈나무르티에게 깃든 영을 알키오네라 이름 붙이고, 그의 이전 생애를 영시했다는 이야기를 협회 내에서 널리 알렸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마하트마・마스터인 쿠트후미와 교신할 수 있었다고 하며, 매일 밤 리드비터와 쿠트후미로부터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122][123] 이 교신은 1910년 『대사의 발 아래에서』로 정리되어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1909년 애니 베산트는 크리슈나무르티와 니티야난다의 후견인이 되었다. 베산트는 크리슈나무르티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교리상·정치에 관해 의견이 갈려도 베산트가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의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121] 리드비터에게 발견된 지 5개월 후인 1910년에 신지학 협회의 심령적인 체험인 '제1비전'을 받았다고 한다.[121]

1911년 베산트는 크리슈나무르티와 니티야난다를 데리고 영국으로 갔다. 베산트는 크리슈나무르티를 세계 교사의 그릇으로 선택한 것에 대해 비판도 받았지만, "동방의 별 교단"(처음에는 "떠오르는 태양의 교단")을 설립했다.[124]

1912년 베산트는 옥스퍼드 대학교 입학 준비를 위해 형제를 데리고 다시 영국으로 갔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국가나 가족과의 유대를 잃고, 자유롭게 되는 동시에, 깊이 고통받았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이탈리아에서 리드비터로부터 "제2비전"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인도인에 대한 편견 속에서 외로운 생활을 보냈다. 입시 공부를 계속했지만, 어디에도 합격하지 못했고, 전쟁 후에는 파리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유럽에서는 신지학에 대한 관심도 잃어갔다.[121]

1921년 인도로 돌아와 영적 스승들과의 교류를 재개했다. 1922년 미국의 캘리포니아 오자이로 이주하여, 로잘린드 윌리엄스를 만났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명상 수행을 하였고, 1922년에 중요한 신비 체험이 시작되었다.[119] 붓다나 마이트레야, 쿠트후미를 보는 체험을 했으며, 격통을 동반하는 육체적인 현상이 있었고, '더 프로세스'라고 불렸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몇 번이나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이 체험은 쿤달리니 각성의 고전적인 표현이라는 견해도 있다.[121] 3년 만에 일단락되었지만, 그 후에도 단속적으로 이어졌다.[125][119]

1929년 8월 3일, 크리슈나무르티는 네덜란드의 오멘 캠프에서 교단을 해체했다.

2. 3. 동방의 별 교단 해체와 독자적 활동 (1929년 ~ 1986년)

크리슈나무르티는 1929년 8월 3일, 네덜란드의 오멘 캠프에서 동방의 별 교단을 해체했다.[70] 그는 지난 2년간 "신중한 고려"를 거쳐 이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그는 "진실은 길이 없는 땅이며, 어떤 길로도, 어떤 종교로도, 어떤 종파로도 접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68] 그는 추종자를 원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누군가를 따르는 순간 진실을 따르는 것을 멈춘다고 말했다.[70]

1920년대 초의 크리슈나무르티


교단 해체 이후, 찰스 웹스터 레드비터를 포함한 저명한 신지학자들이 크리슈나무르티를 반대했다.[69] 크리슈나무르티는 모든 조직화된 믿음, 구루의 개념, 스승-추종자 관계 전체를 비난하며, 사람들을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자유롭게" 만드는 데 힘쓰겠다고 맹세했다.[70] 그는 자신이 세계의 스승임을 명시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이 문제는 무관하다고 주장하거나 모호한 답변을 했다.[71][72][73]

크리슈나무르티의 견해 변화는 교단 해체 이전부터 시작되었다.[74] 애니 베산트와 메리 루티엔스의 어머니 에밀리를 포함한 많은 숭배자들은 그의 견해, 어휘, 선언의 변화에 당황하거나 낙담했다.[75][76] 그는 곧 신지학회와 그 가르침 및 관행에서 스스로를 분리했지만, 평생 동안 일부 회원 및 전 회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의 모든 작업을 '나의' 가르침이 아닌 ''그'' 가르침이라고 언급했다.[77] 그는 동방의 별 교단과 관련된 다양한 신탁 및 기타 조직, 신지학회를 포함한 곳에서 사임했다. 그는 교단에 기증된 돈과 재산, 네덜란드의 성과 땅을 기증자들에게 돌려주었다.[78]

1921년 인도로 돌아와 가족과 친구들을 다시 만나 영적 스승들과의 교류도 재개했다. 1922년에는 미국의 캘리포니아 오자이로 이주하여, 가족이 신지학협회와 관련된 19세의 로잘린드 윌리엄스를 만났다. 로잘린드는 결핵을 앓고 있던 니탸난다의 간호를 부탁받아 친밀하게 지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여기서 명상 수행을 하였고, 1922년에 중요한 신비 체험을 겪었다.[119] 모든 것이 자신이라는 체험, 붓다나 마이트레야, 쿠트후미를 보는 체험을 했으며, 이 전후에는 격통을 동반하는 육체적인 현상이 있었고, 나중에 "더 프로세스"라고 불렸다. 발작과 같은 일종의 혼란 상태가 멈추자 "생명의 샘의 근원"에 닿아 깊은 자애에 감싸였고, 슬픔과 고통은 사라지고, "환희와 영원한 아름다움의 샘"을 다 마시는 듯한 기분이었다고 한다.[125] 로잘린드는 이 과정을 함께 하며 그 모습을 기록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몇 번이나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로잘린드에게 어머니의 이미지를 겹쳐 그녀에게 어머니처럼 말을 걸기도 했다. 니탸난다가 베산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으로 볼 때, 붓다와 마이트레야의 환영을 제외하면, 이 체험은 쿤달리니 각성의 고전적인 표현이라는 견해도 있다.[121] 이 체험은 3년 만에 일단락되었지만, 그 후에도 단속적으로 이어졌다.[125][119]

니티야난다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고, 크리슈나무르티는 깊은 유대감을 맺었던 동생의 회복을 영적인 스승들에게 간청했고, 좋아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안도했다. 그러나, 알룬데일이 스승들이 동생의 완전한 회복을 보장했다고 전한 직후, 1925년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과 어린 시절을 연결하는 유일한 존재를 잃었고, 큰 슬픔에 빠졌다. 고바야시 가즈마사는, 크리슈나무르티는 슬픔 속에서 현실에 직면했고, 회복했을 때 그의 사상은 변했다고 말했다.[121] 피터 워싱턴은 동생의 죽음으로 알룬데일에 대한 불신감과, 스승은 신지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의구심을 강하게 품었지만, 이 세상에 영적인 힘이 있고 자신은 선택받았다는 확신은 흔들리지 않았으며, 자신의 숙명에 대한 확신을 굳히고, 신지학과의 거리를 좁혔다고 말했다.

1925~29년에, 그의 가르침은 메시아를 대망하는 신자들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되었고,[129] 1927년 중반에는 현재 알려진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이 형성되었다.[119] 동생의 죽음 이후, 스승들을 실체적인 존재로 언급하는 일은 없어졌고, 신지학 협회의 권위, 교리, 비전적인 방법도 인정하지 않고, 자유를 추구하며,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121] 이 시기에 도달한 경지를, 그는 스스로 "해방", "융합"으로 표현했다.[119] "해방"의 결과로서 "융합"이 나타나, 조건화로부터의 해방, 전통의 부정이 설해지게 되었다.[119]

크리슈나무르티는 숭배자들에게 둘러싸였지만, 그 상태를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진리는 권위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며, 집단에 속하는 것으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29년 8월 2일 34세에, "여러분은 다른 모임을 만들고, 다른 사람을 선택하십시오. 그 모임과는 저는 관계하지 않으며, 새로운 모임을 만들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관계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사람을 해방시키는 것이며, 무조건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3,000명 정도의 단원이 있던 "동방의 별 교단"을 해산했다. 이때, "진리는 거기에 이르는 길이 없는 땅이다(Truth is pathless land)"라는 구절이 잘 알려져 있다. 세계 스승의 선언에서 교단의 해산까지는 불과 4년이었다. 종교학자 사이토 아키토시는, 크리슈나무르티가 "영원한 목적"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을 해방하는 폭탄 발언을 했지만, 이는 그가 소년 시절부터 신지학협회에서 자라 속박되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용되어 왔던 것에 대한 반대이며, 속박은 자아를 잃게 하고, 자아를 잃으면 목적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해설한다.

"동방의 별 교단"을 해산한 크리슈나무르티는, 1930년에 신지학협회를 떠났다. 1931년에는 소년 시절, 청년 시절의 기억, 특히 신지학협회 입회에 관한 기억을 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산트는 당황하면서도 크리슈나무르티를 개인적으로 계속 사랑했고, 심령적인 면에서 존경을 보냈다. 베산트는 자신과 크리슈나무르티를 위해 고액의 강연 여행을 준비했고, 두 사람은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학교 건설 등에 자금을 댈 수 있는 부유한 숭배자들을 매료시켰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저작으로 인한 수입은 막대해졌고, 그는 거물급 사업가가 되어갔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신지학의 라이벌이었던 D. 라자고팔이 자금 관리, 강연 여행 준비, 출판 사업을 담당했다. 크리슈나무르티와 라자고팔을 임원으로 크리슈나무르티 저작 유한회사(KWINC)라는 신탁 회사가 만들어졌고, 크리슈나무르티의 지불은 여기서 또는 후원자들이 했다. 크리슈나무르티 저작권 유한회사는 수백만 달러, 혹은 수천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의 기부금을 모았다. 그는 엄밀히 말하면 개인 자산은 거의 없었지만, 평생 유명인과 부자들과 교제하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크리슈나무르티 자신은 부에 둘러싸인 생활이 반드시 풍요로운 것은 아니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은 뉴에이지 운동가들로부터 뉴에이지 사상과 일치한다고 받아들여져 인기를 얻고 숭배를 받았다. 뉴에이지에 공감하는 물리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들과도 대화를 거듭했다. 학문의 각 분야는 인위적으로 영역이 설정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연결된 전체라는 입장에서 과학과의 관계를 깊게 했고, 뉴 사이언스의 기수 데이비드 봄과 여러 차례 대담을 했다.[125] 하지만 크리슈나무르티는 "사랑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감상적인 뉴에이지의 감성을 싫어했고, 마찬가지로 뉴에이지에서 인기를 얻었던 인도인 지도자 마하리시 마헤쉬 요기와도 거리를 두었다.

1930년대부터 40년대까지 그를 실무적으로 크게 지원했던 D. 라자고팔과 그의 아내( 로잘린드 윌리엄스), 두 딸 라다와 가족처럼 살았다. 바쁜 라자고팔을 대신해 라다에게 아버지처럼 친밀하게 대했고, 두 번째 아버지였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인도, 영국, 미국에서 그의 철학을 실천하는 학교를 만드는 사업에 관여했다.[129] 로잘린드, 애니 베산트, 올더스 헉슬리와 함께 캘리포니아에 Happy Valley School이라는 사립학교를 설립하는 사업에도 참여했고, 로잘린드는 하루 18시간이나 일하며 학교를 운영했다(1946년 설립, 이후 베산트 힐 스쿨로 개명). 크리슈나무르티는 관여한 학교에서 공적인 역할을 맡는 것을 거부했고,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학생들과 교사들과 이야기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그의 사명을 위해 여성과 관계를 갖지 않고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변에서 기대받았다. 나중에 대리 딸 라다는 크리슈나무르티는 37세 때부터 로잘린드와 불륜 관계였고, 라자고팔이 진실을 알게 된 것은 30년 후였다고 고발했다. 라다에 따르면, 크리슈나무르티가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 난디니 메타를 만나 두 사람이 애인 관계라고 생각한 로잘린드는, 그동안의 불륜 관계를 남편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세 사람의 관계 진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들의 애증과 일의 관계는 얽혀 파탄났다.[126][127] 공식 전기 작가 메리 루티엔스는 라자고팔 일가가 크리슈나무르티를 필요로 했지만, 그가 별거를 결심할 정도로 괴롭혔다고 주장했다. 피터 워싱턴은 라자고팔 부부는 크리슈나무르티가 없어도 금전적으로 풍족했고, 성격상 이러한 관계를 용납할 정도로 순진하거나 어리석어 보이지 않았으며, 라다의 말과 같은 관계가 30년이나 지속되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고, 세 사람은 단순한 삼각관계가 아니라 과거부터 이어져 온 복잡한 생각과 일, 사상이 얽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라자고팔 부부는 1961년에 이혼했다.

신지학 협회에서 독립한 이후 56년 동안 집필, 강연을 계속했다. 조직과 권위를 부정했지만,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 "절대적 자유를 달성한 초인적인 종교가"로 여겨지기도 하는 등, 어떤 의미에서는 권위가 되었고, 조직을 만들었으며, 지지자들의 지원에 의해 독립적인 영적 지도자로서 살았다.[129][128]

크리슈나무르티는 라자고팔이 관리하고 있던 크리슈나무르티 저작 유한회사(KWINC)와 1968년에 결별했고, 일의 관리 체제를 정비해 크리슈나무르티 재단이 만들어졌다.[129] 크리슈나무르티 저작권 유한회사와 크리슈나무르티 재단은 자산 문제로 다투었고, 1974년에 결착이 났지만, 그 후에도 고소와 반소가 20년 동안 이어졌다. 크리슈나무르티 재단은 그의 사후에도 저작 관리를 하는 등 사상의 보급을 목표로 하고 있다.[129][130]

말년의 20년은 라자고팔과 로잘린드와의 갈등도 진정되었고, 1945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정신적 스승으로서 전 세계를 정력적으로 돌아다녔다.

크리슈나무르티와 적대했던 아룬데일도 사망하고, 신지학협회도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크리슈나무르티는 협회와 화해했다. 계속 아디아르를 방문했지만, 47년 만에 신지학협회 본부에 발을 들였다. 이 무렵에는 협회의 세력도 쇠퇴하여 가족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협회의 명예 회원이 되었고, 그의 저서가 신지학협회에서 다시 배포되었다.

뉴욕 재계의 딸이었던 메리 짐발리스트는 영화 프로듀서였던 남편이 사망하여 미망인이 된 후, 크리슈나무르티와 누구보다도 친밀하게 교류하며 함께 행동했다.[125] 1970년, 75세의 크리슈나무르티는 짐발리스트에게 다른 곳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인도조차도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변화한 사람은 없으며, 사람들은 자신의 가르침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진지해지지 않으며, 깨어난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125]

메리 루티엔스의 전기 『크리슈나무르티, 열린 문』에 따르면, 1985년 말부터 발열, 체중 감소 등의 컨디션 불량이 계속되었고, 좀처럼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이듬해 1986년1월 23일의 정밀 검사 결과, 말기 췌장암이 발견되어 죽음이 임박했음이 밝혀졌다. 크리슈나무르티 학교나 출판 등 사후 체제 등, 죽기 전에 정리해야 할 문제에 대처했고, 1986년 2월 17일 캘리포니아에서 사망했다.

3. 사상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사고의 구조와 한계를 밝혔는데, 이는 현대 뇌과학의 성과와 일치한다. 그는 생각은 경험과 지식에서 발생하며, 경험과 지식은 시간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크리슈나무르티에게 시간은 인간의 심리적인 창조물이다.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지식과 시간에 근거를 두고 있기에,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139]

1925년, 크리슈나무르티는 동생 니티야난다의 죽음으로 큰 슬픔에 잠겼고, 이 사건을 계기로 현실을 직시하고 그의 사상은 변했다.[121] 1927년 중반에는 현재 알려진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이 형성되었다.[119] 그는 동생의 죽음 이후, 신지학 협회의 권위, 교리 등을 부정하고 자유를 추구했다.[121] 이 시기에 도달한 경지를 "해방", "융합"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조건화로부터의 해방과 전통의 부정을 의미한다.[119]

크리슈나무르티는 절대주의자, 일원론자, 관념론자, 개인주의자, 무신론자였다.[125] 그는 전통, 권위, 종교, 과거의 교조, 성인, 철인 및 그들의 가르침, 교단, 고전, 내면적인 심상, 신 관념 등 모든 이미지,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서의 요가명상도 거부하며, 모든 종교 및 철학 사상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했다.[125]

그는 진리 발견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감정과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이해해야 "영원한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개인의 노력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어떠한 신앙, 역사적인 전통, 도덕도 생명을 속박한다고 여겨 부정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진리의 실현, 생명의 실현은 자신의 힘을 통해서만 달성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진리의 달성이 자아 의식을 초월하며, 자아 의식은 진리를 실현하는 "방법"에 불과하다고 보았다.[125] 인간은 대립 속에 있으며, 대립하는 것은 무지(무명)이고, 생명은 대립, 이원론을 초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 안에 있는 완전한 생명을 향해 노력함으로써, 환상, 자아 의식은 소멸하고, 분리된 생명이 전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125] 그는 인간을 환경의 산물로도, 신성한 존재로도 보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조건 하에, 최고 실재가 유한해져서 '나'와 일치(범아일여)한다고 보았다.[125] 그는 유일한 최고 실재는 진리이며, 생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발견은 경험이며, 합일이며, 참된 행복이라고 했다.

3. 1.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간결하고 명료하게 자유를 설명하는데, 그의 자유론의 핵심은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이다.[140] 그는 자유가 자기만족을 위한 기회나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유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며, 사상과 이념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140]

그는 어떤 생각이나 느낌은 단순한 반응일 뿐이라고 말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이러한 반응을 심리적 사고라고 불렀고, 이는 기억이 두뇌에서 조건반사적으로 일어나는 행동이며, 여기에는 자유가 없다고 한다.[141]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유에 있어서 어떠한 양보나 타협도 있을 수 없으며, 개인이 누리는 부분적인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인식에 의한 결과나 목적이 아니라, 존재의 근거이자 출발점이다.[142] 자유는 어떤 권위를 따르는 것과 타협할 수 없으며, 목적이 자유라면 시작 자체가 자유로워야 한다. 끝과 시작은 하나이므로, 어떤 형태로든 권위를 받아들이면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143]

자유는 시간과 사고의 운동 범주 안에 존재하지 않고,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며, 의식의 영역 너머에 존재한다.[144] 크리슈나무르티는 완전한 자유는 시간과 인식의 범주 안에서 찾을 수 없으므로, 자유는 나중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3. 2. 진리는 길이 없는 땅

크리슈나무르티는 전 세계를 돌며 강연과 토론을 이어갔다. 그는 스와미 벤카테사난다, 아난다마이 마 등 저명한 종교 지도자 및 학자들과 교류했고, 데이비드 봄과 같은 과학자들과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90] 봄은 크리슈나무르티의 철학에 공감하여, 두 사람은 오랜 기간 동안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90] 이러한 대화는 책으로 출판되어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90]

크리슈나무르티의 철학은 종교, 교육, 심리학, 물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지만, 학계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91] 그럼에도 그는 프리초프 카프라, E. C. 조지 수다르샨, 루퍼트 셸드레이크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사상을 확장했다.[91]

1970년대에는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와 만나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92] 그의 메시지는 간디의 비상 조치 해제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고 자야카르는 평가했다.[92]

1984년과 1985년에는 유엔에서 평화를 주제로 연설했다.[93] 1985년 마지막 인도 방문에서는 '작별' 강연을 통해 자신의 근본적인 질문들과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한 새로운 관심사를 공유했다. 1986년 1월 마드라스에서의 마지막 강연에서는 탐구의 본질, 기술의 영향, 삶과 명상의 본질, 창조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신의 가르침이 특정 개인에게만 전달되는 것을 경계했다.[94] 그는 누구도 자신의 해석자나 계승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95]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동료나 대중 누구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가르침의 통로)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최고의 지성"은 자신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덧붙였다.[96] 그러나 "가르침대로 산다면" 그 무언가에 접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96] 그는 자신을 토머스 에디슨에 비유하며, 어려운 일은 자신이 했으니 다른 사람들은 스위치를 켜기만 하면 된다고 비유했다.[97]

1925년, 크리슈나무르티는 동생 니티야난다의 죽음으로 큰 슬픔에 잠겼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현실을 직시하고, 신지학에서 말하는 스승의 존재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121] 하지만 영적인 힘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숙명에 대한 확신은 굳건했으며, 신지학과의 거리를 좁혔다.

1929년 8월 2일, 크리슈나무르티는 "동방의 별 교단"을 해산하며 "진리는 길이 없는 땅이다(Truth is pathless land)"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종교 조직을 부정하고, 종교와 신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영원한 목적" =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자신을 해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개인의 노력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전통과 권위를 부정하고, 어떠한 신앙도 속박이라고 여겼다.

그는 진리의 실현은 자신의 힘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어떤 길이나 스승의 가르침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인간은 대립 속에 있지만, 생명은 대립을 초월한 것이며, 자신의 안에 있는 완전한 생명을 향해 노력함으로써 환상과 자아 의식이 소멸한다고 보았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무신론자이자 개인주의자였으며,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통해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고 실재가 유한해져서 자신과 일치(범아일여)한다고 믿었다. 그는 "영원한 목적"을 확립하면, "행복이 유일한 목적이며, 단 하나의 절대적 진리이다"라고 말했다.

3. 3. 관계의 중요성

크리슈나무르티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감정과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영원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이끌고,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125] 그는 사람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개인의 노력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말 속에 우상을 인정하지 않고, 전통과 권위를 격렬하게 공격하며, 하늘의 관념에조차 반발하고, 어떠한 신앙도, 역사적인 전통도, 도덕도 생명을 속박한다고 하여 부정했다.[125]

그는 "영원한 목적" = "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길의 첫 번째 전제로서, 자신의 해방(동방의 별 교단, 신지학 협회로부터의 탈퇴)을 실천했으며,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면서라도 그것을 행한 용기가 그의 신념이었다.[125] 그는 "영원한 목적이란 인생의 복잡함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 목적은 자신의 경험, 비탄, 고통, 이해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자신의 경험 외의 것도 아니고, 자신의 경험 외의 환영도 아니다"라고 말했다.[125]

크리슈나무르티는 "진리의 실현, 생명의 실현은 자신의 힘을 통해서만 달성된다"고 말하며, 어떤 길이나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이것은 진리의 달성이 자아 의식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는 자아 의식을 초월하며, 자아 의식은 진리를 실현하는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125] 인간은 대립 속에 있으며, 대립하는 것은 무지이며 무명이다. 한편, 생명은 대립, 이원론을 초월한 것이며, 자신 안에 있는 완전한 생명을 향해 노력함으로써, 환상, 자아 의식은 소멸해 가고, 분단, 분리된 생명이 전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125] 그는 "영원한 목적"을 확고히 가지고, 슬픔과 경험을 살려나가면,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진리와 합일할 수 있다고 했다.[125]

3. 4. 명상과 자각

크리슈나무르티는 전통, 권위, 종교, 과거의 교조, 성인, 철인 및 그들의 가르침, 교단, 고전, 내면적인 심상, 신 관념 등 모든 이미지와 요가명상까지도 거부하며, 모든 종교 및 철학 사상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한 이론적인 우상 파괴자였다.[125]

그는 "영원한 목적"(영원한 행복)으로 가는 첫 번째 전제로서, 동방의 별 교단과 신지학 협회로부터의 탈퇴, 즉 자신 자신의 해방을 실천했으며,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면서라도 그것을 행한 용기가 그의 신념이었다. 그는 "영원한 목적이란 인생의 복잡함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 목적은 자신의 경험, 비탄, 고통, 이해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자신의 경험 외의 것도 아니고, 자신의 경험 외의 환영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진리 발견에는 개인적인 감정과 경험이 가장 중요하며, "영원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이끌고,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개인의 노력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말 속에 우상을 인정하지 않고, 전통과 권위를 격렬하게 공격하며, 하늘의 관념에조차 반발하고, 어떠한 신앙, 역사적인 전통, 도덕도 생명을 속박한다고 하여 부정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진리의 실현, 생명의 실현은 자신의 힘을 통해서만 달성된다"고 강조하며, 어떤 길이나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이는 진리 달성이 자아 의식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는 자아 의식을 초월하며, 자아 의식은 진리를 실현하는 "방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125] 인간은 대립 속에 있으며, 대립하는 것은 무지, 즉 무명이다. 반면 생명은 대립과 이원론을 초월한 것이며, 자신 안에 있는 완전한 생명을 향해 노력함으로써 환상과 자아 의식은 소멸하고, 분단되고 분리된 생명이 전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영원한 목적"을 확고히 가지고 슬픔과 경험을 살려나가면, 더 이상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진리와 합일할 수 있다고 했다.

무지 속에 창조된 불완전한 존재인 "나"가 이원론을 초월한 완전하고 순수한 생명을 자신의 힘과 이해를 통해 실현한다는 이론에는 큰 비약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진리 발견은 "지적인 이론을 초월한 것"이며, "나는 겨우 흔적만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하며, 진리 발견에 있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며, 가장 사랑스러운 자신이 모든 것에 통한다고 하여 철학적으로 증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았다. 몸소 체현해야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체현에 대한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무신론자이자 개인주의자였으며, 전통이나 다른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경험을 통한 이해를 통해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에 도달한다고 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인간을 단순히 환경의 산물이라고도, 어떤 신성한 것, 영원한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조건 하에서는 최고 실재가 유한해져서 '나'와 일치(범아일여)한다고 했다. 실재는 의식과 자아 의식을 초월한 것이며, 유일한 최고 실재는 진리이자 생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발견은 경험이며, 합일이며, 참된 행복이라고 했다. 만약 사람이 한 번 "영원한 목적"을 확립하면, "그것은 행복이며 자유로운 것이지만, 인생이 순수해지고, 더 이상 혼란도 없고, 시간의 혼란도 없다. (...) 시간을 초월할 때, 당신은 자유로워진다. (...) 인생을 자유롭게 하면, 행복이 발견된다. 행복이 유일한 목적이며, 단 하나의 절대적 진리이다"라고 했다.

3. 5. 전체론적 사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사고의 구조와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는 현대 뇌과학의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그는 생각은 경험과 지식에서 비롯되며, 경험과 지식은 시간과 분리될 수 없다고 보았다. 크리슈나무르티에게 시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심리적인 창조물이다. 인간의 행동은 항상 지식과 시간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인간은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139]

1925년, 크리슈나무르티는 깊은 유대감을 가졌던 동생 니티야난다가 27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큰 슬픔에 잠겼다.[121] 그는 동생의 죽음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그의 사상은 변하기 시작했다.[121] 1927년 중반,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은 현재 알려진 형태로 형성되었다.[119] 그는 동생의 죽음 이후, 신지학 협회의 권위, 교리, 비전적인 방법을 부정하고 자유를 추구하기 시작했다.[121] 이 시기에 그가 도달한 경지를 "해방", "융합"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조건화로부터의 해방과 전통의 부정을 의미한다.[119]

크리슈나무르티는 절대주의자, 일원론자, 관념론자, 개인주의자, 무신론자였다.[125] 그는 전통, 권위, 종교, 과거의 교조, 성인, 철인,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 교단, 고전, 내면적인 심상, 신 관념 등 모든 이미지,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서의 요가명상까지도 거부하며, 모든 종교 및 철학 사상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했다.[125]

그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감정과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를 이끌며, 스스로 이해해야 "영원한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사람은 완전히 독자적으로, 개인의 노력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어떠한 신앙, 역사적인 전통, 도덕도 생명을 속박한다고 여겨 부정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진리의 실현, 생명의 실현은 자신의 힘을 통해서만 달성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진리의 달성이 자아 의식을 초월하며, 자아 의식은 진리를 실현하는 "방법"에 불과하다고 보았다.[125] 인간은 대립 속에 있으며, 대립하는 것은 무지(무명)이고, 생명은 대립, 이원론을 초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 안에 있는 완전한 생명을 향해 노력함으로써, 환상, 자아 의식은 소멸하고, 분리된 생명이 전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125]

크리슈나무르티는 인간을 환경의 산물로도, 신성한 존재로도 보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조건 하에, 최고 실재가 유한해져서 '나'와 일치(범아일여)한다고 보았다.[125] 그는 유일한 최고 실재는 진리이며, 생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발견은 경험이며, 합일이며, 참된 행복이라고 했다.

4. 교육 철학

1987년 인도 우표 속의 크리슈나무르티


크리슈나무르티는 인도에 5개의 학교를 설립했는데, 가장 오래된 학교는 1928년 안드라프라데시 주 마다나팔레에서 약 16.09km 떨어진 그의 출생지에 설립된 리시 밸리 학교이다.[101] 그는 또한 1969년 영국에 브록우드 파크 학교를 설립했으며,[102] 캘리포니아에는 오크 그로브 학교 (오자이, 캘리포니아)를 설립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교육 목표를 제시했다.

# '''글로벌 관점''': 부분과 구별되는 전체에 대한 비전; 결코 분파주의적인 관점이 있어서는 안 되며, 항상 모든 편견에서 벗어난 전체론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 '''인간과 환경에 대한 관심''': 인류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을 돌보지 않으면 인간에게 부메랑이 될 것이다. 올바른 교육과 모든 곳의 사람들 간의 깊은 애정만이 환경 문제들을 포함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다.

# '''과학적 정신을 포함하는 종교적 정신''': 종교적 마음은 고독하지 않고 홀로 있다. 그것은 사람들과 자연과의 교감 속에 있다.[103]

1960년대에 인도, 미국, 영국에 설립된 크리슈나무르티 재단은 국내외 7개의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5. 비판과 평가

타마키 코시로는 크리슈나무르티의 근본 입장은 "있는 그대로를 경험하고, 경험한 그대로를 관찰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본능적이고 자연적으로 분단된 인간의 근본 견해를 전체 세계에 복귀시키려는 것이다. 그것이 곧 모든 과거에 죽어 오직 현재에만 살아가는 것이며, 진정한 창조이다"라고 했다.[125]

그의 가르침은 권위를 인정하는 정통파 힌두교와는 달랐다. 인도 철학자이자 연구자인 풀라 티루파티 라주는 "그의 이론은 명확하지 않으며,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고, 저변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그의 설을 도식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라고 전제한 뒤, 가장 조직적으로 반(反) 전통주의 철학을 발전시킨 인도 현대 사상가이자, 현대 인도에서 단 한 명뿐인 반(反) 전통주의자로 평가했다. 불교학자 타마키 코시로는 "그는 인간이 진정으로 살아가는 근원의 세계에 눈을 뜨려고 했고, 마침내 수행했으며, 어떠한 타협도 배제하고 모든 전통을 부정하며, 거의 뜻대로 그 세계를 실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극찬했다.[125]

타마키 코시로는, 그는 있는 그대로를 경험하고, 경험한 것을 관찰하라고 강조할 뿐이지만, 해탈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인생 경험이 보여주는 바와 같다고 지적하며, "왜 그는 그것에 주목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125] 그는 저작에서 그의 사상의 배경에 있는 근본 체험이 확증적이며, "능동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의 모습"이 실감 있게 전해져 오지만, 사상 자체는 극히 단순하고 획일적인 인상도 준다고 평했다.[125]

크리슈나무르티는 죽음의 공포는 관찰하는 주체와 관찰되는 죽음이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죽음의 공포는 "관념"일 뿐이라고 말했다. 타마키 코시로는 70대·80대의 크리슈나무르티의 친구들과 자신의 죽음의 위험에 처했을 때의 발언은 세속적이며, 죽음에 대한 집착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하며, 사람들에게 설했던 죽음에 대한 견해와 그 자신의 죽음에 대한 실제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평했다.[125]

사이토 아키토시는 그의 사상에서 진리의 발견은 최종적으로 "비약적인 체험"이 되며, 완전히 새로운 사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철저하게 권위에 반항한 사상 양식에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타마키 코시로는 그의 사상은 "생활에서 스며 나온 거부의 관념"에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

사이토 아키토시에 따르면, 그의 철저하게 반항적인 사상은 인도 사상의 정통에서 벗어나 있지만, 진리의 발견과 체험은 완전히 인도 사상에 입각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은 일본의 선과 비슷하게, 길을 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성인을 만나면 성인을 죽이라고 설하며, 이것이 구원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 모든 사물이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의 조건화에 의해 성립한다고 설한 그의 사상은 불교의 연기설과 마찬가지이며, 아집을 문제 삼고, 있는 그대로의 관찰을 통한 아집으로부터의 해방을 설하며, 전통을 부정한다는 점에서도 불교와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119] 피터 워싱턴은 정신적인 의지를 자기 내부에 찾는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은 고대 인도의 아드바이타 베단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며, 깊은 탐구 끝에 선조의 고행자들의 금욕적인 방법에 회귀한 것이라고 평했다.

종교 사회학자 이토 마사유키는 사고·자아와의 일체화를 떠나는 것, 자각(의식)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설파한 에크하르트 톨레의 계보로서, 크리슈나무르티나 라마나 마하르시를 이해할 수 있다고 평했다.

6. 저서

다음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주요 저서 목록이다.

제목원제출판 연도번역자출판사비고
스승의 발 아래에서At the Feet of the Master1910다나카 에미코류오 문고Mabel Collins|메이블 콜린스영어의 Light on the Path|도의 빛영어 동시 수록
행복의 왕국The Kingdom of Happiness1928
지혜의 연못The Pool of Wisdom1928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The First and Last Freedom1954
삶에 대한 주석Commentaries on Living1956–1960
기지로부터의 자유Freedom from the Known1969
크리슈나무르티의 노트'Krishnamurtis Notebook''1976
크리슈나무르티의 저널'Krishnamurtis Journal''1982
크리슈나무르티 자신에게Krishnamurti to Himself1987
아라한도(阿羅漢道)1925이마 타케히라문당사
자아의 종언 - 절대 자유로의 길네기 히로시, 야마구치 케이조 사부로시노자키 서림
생과 각성의 코멘터리 - 크리슈나무르티의 수첩에서 〈1-4〉오노 준이치춘추사
크리슈나무르티의 신비 체험오오에 마사노리 감수, 나카타 슈사쿠메르크마르
크리슈나무르티의 일기미야우치 카츠노리메르크마르
최후의 일기타카하시 시게토시헤이카와 출판사
자기의 변용마츠모토 케이이치메르크마르
지혜의 교육오노 준이치춘추사
자유란 무엇인가오노 준이치춘추사
명상과 자연오노 준이치춘추사
배움과 지혜의 시작오노 준이치춘추사
생의 완전한 변용오노 준이치춘추사
미래의 생오노 준이치춘추사
크리슈나무르티의 명상록 - 자유로의 비상 (mind books)2000오노 준이치헤이카와 출판사
생의 전체성오노 준이치, 세이신 이치로헤이카와 출판사
진리의 씨앗오노 준이치메르크마르
인류의 미래와타나베 미츠루JCA 출판
명상나카가와 요시하루UNIO
공포 없이 살아가기아리이 앤젤헤이카와 출판사
당신은 세계다타케부치 토모코UNIO
어린이들과의 대화 - 생각해봐1992후지나카 타카시헤이카와 출판사
자넨의 크리슈나무르티기부루 쿄코헤이카와 출판사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 크리슈나무르티 대담집오노 준이치코스모스 라이브러리
꽃처럼 살아가기 - 생의 완전성요코야마 노부히데UNIO
지혜의 깨달음 - 슬픔이 꽃피어 끝날 때코바야카와 쇼UNIO
지혜로부터의 창조 - 조건화된 교육을 넘어 (크리슈나무르티 저술집 제8권 1953-1955)후지나카 타카시UNIO
내일이 바뀔 때 - 크리슈나무르티 최후의 강화코바야카와 쇼, 후지나카 타카시UNIO
시간의 종언 - J. 크리슈나무르티 & 데이비드 보엠 대담집2011와타나베 미츠루코스모스 라이브러리
유연하게 살아가기 위해 - 젊은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오노 준이치코스모스 라이브러리난디니 메타에게 보내는 편지
생과 만나기 - 사회에서 물러나지 않고 당신의 길을 찾기 위한 가르침오노 류이치코스모스 라이브러리
예술로서의 교육 - 크리슈나무르티 서간집코바야시 마사유키코스모스 라이브러리
사계절의 명상 - 크리슈나무르티의 하루 한 이야기오노 준이치 감수, 코마이 히사요코스모스 라이브러리
고요한 정신의 축복 - 크리슈나무르티의 연속 강화오노 준이치코스모스 라이브러리
전통과 혁명 - J. 크리슈나무르티와의 대화오노 준이치코스모스 라이브러리
사랑에 대해, 고독에 대해나카가와 마사오히로이케 학원 출판부
고요함의 발견 - 이원성의 갈등을 넘어 (크리슈나무르티 저술집)요코야마 노부히데, 후지나카 타카시, 나이토 아키라UNIO
스탠퍼드의 인생관이 바뀌는 특별 강의 당신 안에, 전 세계가 있다2013나카가와 요시하루PHP 연구소
붓다와 크리슈나무르티 - 인간은 변할 수 있는가?2016쇼다 다이칸·요시다 토시코·오노 준이치코스모스 라이브러리
경계를 넘는 지혜: 인간이라는 것의 핵심 - 크리슈나무르티 토크 셀렉션 12017요시다 토시코·쇼다 다이칸코스모스 라이브러리
진정한 명상: 자기 안의 빛 - 크리슈나무르티 토크 셀렉션 22017요시다 토시코·쇼다 다이칸코스모스 라이브러리
관계라는 거울 -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볼 수 있다2018닛세이 아키UNIO
신화와 전통을 넘어 〈1〉DVD로 보는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시라카와 카스미 감수, 오노 준이치 번역사운출판
신화와 전통을 넘어 〈2〉DVD로 보는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시라카와 카스미 감수, 오노 준이치 번역사운출판
진정한 혁명 - 크리슈나무르티의 강화와 대화야나가와 아키오, 오노 준이치 번역코스모스 라이브러리
영한 대역 변화에의 도전 - 크리슈나무르티의 생애와 가르침야나가와 아키오 번역, 오노 준이치 감수코스모스 라이브러리



이 외에도 다양한 저서와 강연록, 대담집 등이 출판되었다.

7.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사상은 한국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저서들은 다양한 출판사를 통해 한국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다음은 한국어로 번역된 크리슈나무르티의 주요 저서 목록이다.

출판 연도제목출판사번역자원제 (존재하는 경우)
1979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정우사정종현Freedom from the known
1980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1, 2, 3창하안정효
1982굴레에서 해방을심설당Education and the Significance of Life
1982삶의 진실에 대하여까치이병기
1982자기로부터의 혁명 1, 2, 3범우사권동수The first & last freedom
1983바람처럼 물결처럼김영사류시화On education, Onlyrevolution
1983잃어버린 나를 찾아서동아
1984자유의 갈망진화당편충우
1984명상공간한마음이희구The impossible question
1985생애와 사상: 별의 교단 해체까지정신세계류시화The yeard of awakening
1985어떻게 사느냐 묻거든선영사이종관
1987관심의 불꽃범우사강옥구
1987시간의 끝에 서서동아
1987지성과 자아의 계단동화문학
1988우리 자신 속의 독재자명상박상준Last Talks at Saanen
1988시간의 벽을 넘어서문화출판이용호
1988나의 삶을 찾아서학일출판이종관
1989마지막 일기책세상김동림
1989나는 또 하나의 너햇살이성규
1989삶의 진실을 찾아서홍신문화최봉식
1990자유를 찾아 방랑하는 성자문조사
1990고뇌하는 그대 가슴 속에만참빛명예량
1990그대 내게로 와서 우리 다시 사랑백만인김대규
1990명상의 언덕을 넘어서조항래The only revolution, Urgency of change
1990혼자서 가야만 하리라백상김정우Say of J. Krishnamurti
1990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행복하다영언문화김정우
1990사랑 할수록 아름답습니다가람문학정용택
1991벌거벗은자와 동행하고 싶다혜서원정상진
1991명상, 삶의 몇 가지 비밀동화문학김영
1991베란다에서 바다로 떠나다진화김현묵Poems & Parables
1991자기로부터의 혁명고려문학현기용
1991나도 비고 너도 비고덕성문화윤시원
1991사랑하는 사람 오직 그만이 혁명적예문각
1991고개숙인 성자세종출판
1991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문화출판이용호Freedom from the known
1992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보성출판이현복Freedom from the known
1992삶과 지성에 대하여학원사이윤기
1992독수리 비상기지개류종열
1992삶의 수업기지개류종열
1994시간의 종말고려원성장현The ending of time
1994사랑보다 소중한 삶의 의미가림최윤영
1994교육받은 야만인(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의 대화)한성문화사공병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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